평소에 알고 지내는 박사님께서 ‘치매머니’와 관련된 영상을 보내주셨다. 요즘 일어나는 사례를 중심으로 만든 영상이었다. 치매머니가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치매와 돈,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초고령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두 단어는 생각보다 깊게 얽혀 있다.
노후에 가장 큰 두려움은 건강과 돈을 잃는 거다. 특히 치매는 기억을 빼앗아 갈 뿐 아니라 경제적 판단 능력까지 무너뜨린다. 가족 몰래 고가의 물건을 사거나, 보이스 피싱에 큰돈을 날려버리는 사례도 흔하다. 여생을 지탱해야 할 재산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이 두려움 앞에서 등장한 개념이 바로 치매머니다.
치매머니란 치매 환자가 안전하게, 그리고 존엄을 유지하며 경제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새로운 장치다. 일정 금액 이상은 결제되지 않도록 제한하거나, 가족이 사용내역을 실시간 확인할 수 있는 전자화폐, 혹은 지역 내 돌봄 가맹점에서만 쓸 수 있는 지역화폐가 그 예다. 즉 돈을 막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쓰도록 돕는 ‘보호의 장치’인 셈이다.
이미 해외에서는 실험이 시작됐다. 일본 일부 지역에서는 치매 노인을 대상으로 ‘한정 화폐’를 도입했다. 금융사기를 막고 일상적인 소비는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은행에서는 치매 진단을 받은 고객의 계좌를 보호자가 관리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돈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은 곧 삶을 지키는 일이다.
한국 사회에도 치매머니는 시급한 과제다. 치매 환자는 이미 100만 명을 넘어섰고, 늘어날 전망이다. 치매 환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부담이 되고 있다. 치매머니는 단순한 복지정책이 아니다. 가족의 걱정을 덜고, 금융사기를 줄이며, 사회적 비용을 예방하는 안전망이 될 수 있다.
보내온 영상 속의 주인공은 중증 치매 아버지의 법정 후견인 아들 오 씨였다. 4년 전 오 씨는 아버지가 치매 판정을 받았고, 난관과 마주했다. 자산을 매각해 생활비와 돌보는 비용 등으로 사용하려 했지만, 모든 금융거래가 막혔다. 있어도 쓰지 못하는 치매머니가 된 것이다.
아버지의 법정 후견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인 후견 등기 사항 증명서는 직접 법원을 방문해야만 받을 수 있다. 인터넷이나 가까운 곳에서 발급받는 방법은 없다. 치매머니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순간은 부동산이나 예금과 같은 ‘재산 처분’ 문제에 부딪힐 때다. 아버지가 치매 진단을 받으셨더라도, 진단서만으로는 법적 권한이 주어지지 않는다. 가족이라 해도 타인의 재산을 함부로 관리하거나 처분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법원에서 ‘성년후견인’으로 인정받아야 가능하다. 이 과정은 절차도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사랑하는 가족이 치매를 앓고 있는데도 법은 냉정하게 ‘타인의 재산’으로 간주하는 현실, 치매머니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치매머니가 지키려는 건 단순히 돈이 아니다. 돈 속에 담긴 노인의 삶, 그 존엄과 자율성이다. 치매에 걸린 어르신이 마지막까지 스스로 선택을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치매머니의 철학이다.
정부가 공공 치매 후견 사업을 일반 치매 노인에게 확대하겠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치매에 대비해 성년 후견 제도 등을 상담받을 수 있는 기관조차 없다고 한다. 누구나 치매라는 길을 걷게 될 수 있기에 치매머니는 곧 나와 우리 가족의 문제다. 미리 준비하는 지혜와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다.
기억을 잃어도 인간의 품격은 잃지 않도록, 돈은 헛되이 흘러가지 않도록, 치매머니는 바로 그 다리를 놓는 새로운 화폐다.
강윤정
마중물교육파트너스 대표
평생교육 석사
시니어 TV 특강강사
인문학 맛있는 고전 진행자
웰라이프 및 웰다잉 강사